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자크 루소 (문단 편집) === 초년기 === 1712년, 장 자크 루소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제네바는 [[칼뱅파]] 개신교를 믿는 도시 국가였으며,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토착 상류층과 투표권이 없는 다수의 이주민들 사이에 계층간 대립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투표권이 있는 제네바 시민 계급이었지만 집안은 가난했다. 귀족 출신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산후유증으로 죽었는데, 아내를 사랑했던 루소의 아버지는 어린 루소를 잡고 죽은 아내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고백록』에 나온다. 자신으로 인해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격에 심한 균열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아이작 루소는 10여 년간 어린 루소를 키웠으며, 루소는 어머니가 남긴 모험 소설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의 책을 읽으면서 성장했다. 루소가 10살이었던 1722년, 아버지는 귀족과 다퉜고 이에 당국이 개입하자 아버지는 어린 루소를 버리고 제네바를 떠났다. 어린 루소는 외삼촌에게 맡겨졌는데, 외삼촌은 다시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루소를 랑베르시에 목사에게 맡겼다. 목사와의 생활은 의외로 행복했으나 불과 2년 뒤, 이제 루소가 일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 외삼촌은, 루소를 조각가 아벨 뒤코묑에게 넘겼다. 하지만 루소는 천성적으로 규율과 복종을 강요하는 그 도제 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었고, 게다가 1726년 아버지가 재혼까지 하면서 자신은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728년, 16살이 되었을 때 루소는 자신의 비참한 삶을 더는 참을 수 없었는데, 제네바 시의 야간 통행금지령을 어긴 것을 계기로[* 밤늦게 왔다가 도시의 성문이 닫혀서 못 들어가게 되었다.] 외삼촌마저 자신을 더이상 챙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생계가 막막해진 루소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적당한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는 어떤 신부의 소문을 듣고 근처 [[사르데냐 왕국]]의 [[사부아|사보이아]][* [[이탈리아어]]로 사보이아라 부르는 사부아는 현재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에 속하나 [[이탈리아 통일]] 이전에는 [[이탈리아 왕국|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르데냐 왕국의 영토이자, 사르데냐 왕국의 왕실인 [[사보이아 가문]]의 발원지였다.]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 신부는 루소에게 '개종자들을 도와주는 마음씨 좋은 귀족 부인이 있으니, 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소개장을 써주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찾아간 [[샹베리]]에서 루소는 평생을 기억할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남작 부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루소는 16세였고 바랑 부인은 29세로 남편과 별거중이었다. 바랑 부인은 루소를 집사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루소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시켰다. 이를 통해 루소는 많은 책들을 접하면서 견문이 넓어졌다. 루소는 무엇보다도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기뻤다. 루소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인 자신을 거두어 교육까지 시켜준 바랑 부인을 내심 '엄마'로 여기고 있었지만, 바랑 부인은 루소를 단지 남자 집사로 보고 있었고, 급기야 부인은 루소를 애인으로 삼았다. 루소는 그것을 거절할 엄두도 못냈었다. 훗날 그는 『고백록』에서 '그녀와의 관계는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루소는 바랑 부인이 바랬던 집사에 전혀 소질이 없었고 그가 26세였을 때 부인은 다른 집사 겸 남자 애인을 만들면서 루소를 쫓아냈다. 루소는 한동안 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주변을 맴돌다 결국 포기하고 [[프랑스 왕국|프랑스]]로 건너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